세계의 참역사

[스크랩] 조.청 국경선은 요하(압록)에서 아무르강(두만강)까지다

기차니 2011. 8. 15. 12:45

간도(만주)는 국제법상 통일KOREA의 영토다!

- 독도에 해군을 배치하여 철저히 방어하고, 제주해군기지는 조속히 설치해야 한다!-

 

"내 목을 자를지언정 한 치의 땅도 내놓을 수 없다."19세기말 토문감계사(오늘날 국경회담 대표자) 이중하는 두만강 국경선을 확정시켜 간도땅을 차지하려는 청나라의 강압적인 태도에 목숨을 걸고 맞섰다.
 
대한민국의 영토인 독도의 영유권을 포기한다는 한일독도협약에 서명한 일본장교 박정희때문에 해양영토를 중시하는 일본이 독도영유권 주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판국이다. 이에 대해 자주주권국가라면 단호하게 한일독도협약을 폐기하고, 독도에 해군을 배치하여 방어를 해야 하고, 국제사법소 제소에도 철저하게 준비해야 하고, 대일외교적으로는 유라시아 철로를 사용하기 위한 조건으로 독도영유권 포기 협약서를 쓰라고 요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정부는 현재 강하게 제기되고 있는 해군배치 주장에 대하여 신중론과 함께 조용한 외교만을 운운하고 있어 이명박정부가 일본정부는 아닌지 하는 국민적 분노를 자아 내고 있다.



대마도가 엄연히 한국영토였음이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 입증된다

또한 지나국이 대한민국 영토인 이어도 부근의 영해까지 자기들 영해라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마땅히 자주주권국가라면 제주도민들에게 해양영토의 중요성과 함께 현재 지나국의 침략성을 자료에 근거하여 논리적으로 설득하여 제주해군기지를 조속히 건설해야 할 것이다.

일제가 청나라와 맺은 국제법위반의 간도협약으로 청나라에 넘겨 주었던 간도를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

백두산 정계비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킨 후 만주에서 지나대륙으로 이전한 후에 관할을 주관하는 국가가 애매한 중림지역에서 조선인과 청나라인들 간에 산삼 채취를 두고 충돌이 간간이 일어 나던 중 숙종 38년(1712) 조선과 청(淸)이 국경을 정한 내용을 적어 백두산에 세운 비를 이르는 말이다. 숙종은 청 나라의 오라총관(烏喇總管;吉林總管) 목극등(穆克登)이 국경을 정하기 위해 오자, 조선은 박권(朴權)을 접반사(接伴使)로 임명하여 이에 대처하게 하였다.

 

일제에 의하여 철거되기 전의 백두산 정계비와 비문내용 

그러나, 박권은 고령을 핑계로 백두산 등정을 포기한 채 군관 이의복(李義復)과 통역관 김응헌(金應憲) 등을 현지에 보내 결정하게 하였다.

그 결과 청나라의 일방적인 주장대로 너비 두자, 길이 석자 가량의 비에 비문을 새겨 세웠는데 이것이 곧 백두산 정계비이다. 청나라 오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이 청나라 황제 강희제의 칙지를 받들어 경계를 조사하기 위하여 직접 살펴 보았다. 서쪽으로는 압록강이 경계가 되고 동쪽으로는 토문강(土門江)이 경계가 되므로 그 분수령(分水嶺) 위에 돌에 새겨 기록한다.

비문에서 필첩식(筆帖式)은 청나라 벼슬아치 명칭으로 청나라가 통치 중임으로 만주어와 한어의 상소문이나 비문을 번역하던 구길아치의 호칭이다.

백두산 산정 동남방 약 4km, 해발고도 약 2200m 지점에 세운 이 비의 위치도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두 나라의 국경 문제가 일단락 되었는데 그 후 고종 17년(1880) 청은 돌연 국경 문제를 야기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두만강(頭滿江) 상류가 도문강(圖們江)이고, 도문강이 곧 토문강(土門江)으로서 조선과 청의 국경선은 압록강- 두만강 선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토문(土門)강은 만주를 흐르는 송화강(松花江) 상류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정계비에 따르면, 압록강에 해당하는 요하에서 동해로 빠져 나가는 토문강 이남에 속하는 만주지역이 모두 조선 땅이 되는 셈이다. 지금은 조선족이 자치주를 이루고 있는 연변자치주 지역이 대부분 이 곳에 속한다.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정해 버린 조.청 국경선을 해석함에 있어 우리는 흔히 압록강을 지금의 압록강으로 착각하는데서 지나국에게 백두산마저 빼앗긴 것이다.

 

고종 22년(1885년) 간도(間島) 국경문제가 일어 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을유감계 회담을 회령에서 열었다. 이 비문(碑文) 중의 토문(土門)이 논쟁의 쟁점이 되어 한국측과 청나라 측간에 논의가 있어서 오랫동안 해결을 짓지 못하였다. 결국 두만강 선을 고집하는 청과의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후로도 간간이 재발한 국경 분쟁은 지지부진 매듭을 짖지 못하다가, 순종 융희 3년(1909년. 융희3년) 일제가 북경에서 청국(淸國)과 회담하고 토문강에서 훨씬 남하하여 지금의 두만강(豆滿江)이 조ㆍ청의 국경이라고 임의로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우리 영토이던 간도(間島) 전역(全域)을 청나라에 넘겨 주게 되었다. 그 후 만주사변 때 악날한 일제에 의해 정계비까지 철거되었다.

지나국이 정부차원에서 진행해 온 동북공정은 단순히 역사문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간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 향후 질서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북이란 용어 자체도 옛 만주지역으로 조선족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을 일컫는다. 한국에서는 간도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전문가들은 한반도의 통일 가능성이 높아 지자 지나국이 영유권 분쟁 가능성이 있는 이 곳에 대해 본격적인 준비 작업에 나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 청나라 황제 강희제 때 만들어진 당빌지도. 현재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레지선'으로 불리는 조선과 청의 국경선이 그려져 있다. 평안이라는 영문지명이 압록강 너머에 적혀져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내 목을 자를지언정 한 치의 땅도 내놓을 수 없다."19세기말 토문 감계사(오늘날 국경회담 대표자) 이중하는 두만강 국경선을 확정시켜 간도땅을 차지하려는 청나라의 강압적인 태도에 목숨을 걸고 맞섰다. 함경도 안변부사였던 이중하는 1885년 조정으로부터 감계사로 임명받았다.

청은 당시 두만강 이북 지역에 조선 유민들이 늘어나자 이들에게 이남으로 내려가든지 청나라 백성이 되든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강요했다. 청은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기 위해 외교문서를 보내 감계담판(국경회담)을 하자고 나섰다.

이중하는 1712년 백두산 정계비에 나타난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니라 북쪽으로 흘러가는 송화강의 지류임을 끝까지 주장했다. 이중하는 청 측 대표 덕옥, 가원계, 진영 등과 함께 직접 백두산 정계비를 답사하면서 논란이 된 강의 물줄기를 조사했다.

정계비 인근에는 압록강과 송화강 지류의 물줄기가 위치해 있었고 정계비와 송화강 지류 사이에는 문헌에 나타난 대로 나무, 돌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이 답사로 청나라 측은 자신들의 주장이 먹혀들어가지 않게됐다.

2년 후 다시 청나라는 감계담판을 열자고 했다. 이때에도 감계사로 임명받은 이중하는 정해감계담판에서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로 청측을 요구를 묵살했다. 당시 이중하는 협상 내용을 상세하게 일기로 남겼다. 그가 쓴 <감계일기> <감계전말>은 간도영유권 주장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중하의 기록은 1910년 '한일합방' 후 사라졌다. 그는 나라를 잃자 아들과 함께 경기도 양평으로 낙향했다. 퇴직금 명목으로 은사금을 내렸지만 이를 받지 않았고 합병기념 훈장조차 돌려보냈다. 한일합방이 된지 7년후인 1917년 이중하는 나라를 잃은 분노를 잊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100년전 대한제국 영토인 간도는 현재도 국제법상 대한제국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영토다.철저히 준비하여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여 되찾아야 할 땅인 것이다. 그 만큼 협약서는 중요한 것이다. 나라간 협약서 내용이 노예계약서면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이다.

영남인들이 정치적 우상화하는 박정희라는 자는 카멜레온같은 시대적 기회주의자로서 일본장교에서 소위,빨갱이 장교를 거쳐 반공장교로 돌변한 후에 군사쿠테타로 권력잡고 독도영유권을 포기한 매국노에 불과함에도 불구함에도 박정희는 욕하지 않고 일본만 욕한다. 그래서 외부의 적보다는 외부의 적을 이롭게 하는 내부의 적이 더 위협하다는 것이다. 이런 반민족적이고 반국가적인 매국노들을 우상화하는 우매하고 어리석고 옹고집의 영남패거리 정치집단에게는 절대 권력을 부여해서는 안 되며, 부족주의적인 패거리 정치의식을 무참히 무너 뜨려야 하는 것이다. 권력을 강도도적들에게 맡기면 그 권력은 결국 강도도적권력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한 배경 또한 박정희가 대한민국 국정책임자 자격으로 싸인해 준 한일독도협약에 의거하는 것이고, 간도를 되찾겠다는 대한민국도 영토문제와 관련하여 청나라와 조선과 협의하여 세운 백두산정계비문때문이다.그러나 이 백두산 정계비 내용이라는 것도 조선의 협상책임자 박권이 노환으로 인하여 비전문가들인 군관 이의복(李義復)과 통역관 김응헌(金應憲)를 보내는 바람에 청나라의 주장이 들어간 일방적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을 지나지역에서 만주지역으로 몰아 내고 지나공산국가를 세운 모택동이 8.15이후 북한 김일성 주석에게 제안했던 내용 그대로 요하동쪽 만주지역은 본래 대한민국의 고토이고, 한반도에서 만주로 이주한 고려인 김합보(본명 김행:신라 마의태자 손자) 후손되는 아골타와 누루하치가 세운 나라가 금.청나라이고 청나라가 100년전까지 지나대륙을 통치하고 지금의 지나국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시켜 준 은인이니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지나국은 요하동쪽땅(만주)를 통일KOREA에 선물해야 할 것이다.

또한 수.당나라300대군을 격파하고 망하게 만든 900년 고구려와 고구려의 계승국인 대진국(발해:당나라가 부른 국호)을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 날조하지 말 것이며, 요하(본래 KOREA고리강)지역의 요하문명을 지나문명이라고 날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나국 스스로가 생각해도 비지땀흘리는 양심불량한 범죄행위라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대국이란 영토와 인구만 크고 많다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에 합당한 도덕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북관대첩비의 진실-조.일전쟁 당시 함경도는 현재 동북 삼성지역이였다

최근 북관대첩비가 10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제 때 약탈되어 일본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보관된 지 100년 만에 귀환되었다. 일본 군구주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 한 구석에 보관된 것이다.

이 유물이 여기에 보관된 것은 한국의 유물을 보관하는 차원이 아니라 저주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소품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지난 일제가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한반도 8도에 수백개 철심을 박아 정기와 지기를 끊으려 하였다. 이와 같은 연장선에서 야스쿠니 신사 일반인 손길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곳에 가두고 비석머리에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 엄청난 머리돌을 눌러 100년 동안 저주의식을 거행한 것이다.

바로 조.일 전쟁 당시 강력한 항거를 한 함경도의 기운을 꺽는 상징을 북관도 대첩비로 삼은 것이다.그 곳은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철저히 격리된 장소에 보관하였다.

북관대첩비는 조.일 전쟁 당시 함경도 북관지역의 승첩비를 일제시대에 관동군이 본국으로 가져 와서 보관한 비문이며, 최근 반환운동이 결실을 맺어 다시 한국 땅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북관대첩비에 숨겨진 역사적 진실은 놀라운 것이었다. 함경도의 북관지역이 길림과 장춘일대를 말하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 8도 중에 하나인 함경도라는 사실이다. 최근 재 부활한 KBS역사 스페셜에서 100년 만에 귀환한 북관대첩비에 방영된 함경도 지도가 요동반도를 가리키고 있다. '북관'이라고 했을 때는 지나대륙으로 들어 가는 산해관의 북쪽지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백두산정계비'의 공식명칭은 조.청 국경선 중간지역에 해당하는 장백산에 세워진 정계비'이라 해야 짝이 맞다 할 것이며, 현재 백두산정계비는 일제가 날조와 혼동을 유도하기 장백산 꼭대기에서 백두산으로 이전해 왔을 수 있다. 그래도 불안하니까 아예 없애 버렸을 것이다. 정계비문에 따르면 조.청 국경선은 서쪽으로 압록강에서 동쪽으로 토문강이라 했다. 즉, 압록강은 요하를 가리키고, 토문강은 동해로 나가는 아무르강을 가리킨다 할 것이다. 그래야 함경도지역이 요동지역임을 증명하고 있는 북관대첩비문의 내용이 비로소 이해가 될 것이다.

<삼국유사>와 <요사 지리지>에서 "요하를 일명 압록이라 하였다" 라고 언급하고 있으며,[환단고기]<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서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이고,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난하가 '요수(요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0권>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鴨綠江),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松花江)과 혼동강(混同江), 동북으로 흐르는 것은 소하강(蘇下江)과 속평강(速平江),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두만강(豆滿江)이다.” “여진 말로 만(萬)을 두만(豆滿)이라고 하는데, 여러 갈래의 물이 여기로 합류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라고 기술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여러 갈래의 물이 하나로 합류되는 것이 두만강이므로 현 두만강이 아닌 것이다. 또한 남으로 압록강이 흐르고 이 압록강이 요하라면 북으로 흐르는 것은 송회강과 여러 지류에 해당된다. 이 지류가 다시 동으로 흘러 하나로 뭉쳐 바다로 흘러 간다고 하였다. 바로 아무르강을 말하는 것이다.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윤복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