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참역사

[스크랩] 고구려유민 고선지에 비하면 한니발.나폴레웅은 아가들

기차니 2011. 8. 7. 11:13

 

고선지 장군으로부터 도전정신을 배운다-"할 수 있고 하며 되며 결과는 최고다!"(백골부대 정신) 

고구려 멸망 후 한반도에서 중앙 아시아까지 이주한 고구려유민 고선지

고선지가 마음만 먹었다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재건할 수 있었다 

당나라를 엎어 버리고 유라시아 대륙을 경영한 고구려를 재건했어야 했다

 

고선지의 이주로만 보아도 고대 한반도인들은 만주와 초원을 거쳐 중동(슈메르)과 이집트까지 충분히 이주하여 거대 피라미드 건설 등 해(환)문명을 건설했음을 알 수 있다.


 

세계에 그 이름 크게 빛낸 KOREAN고선지의 실크로드 정벌전

 

고선지의 여러 차례에 걸친 서역원정의 목적은 서역에 대한 경영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데 있었다.

 

고선지의 천재적 참모, 봉상청


실크로드의 온갖 전투에서 연전연승의 신화를 이룩한 고선지 뒤에는 천재적인 참모가 있었다. 그는 봉상청이란 인물이었다. 봉상청은 일찍이 부모를 잃고,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서 학문이 깊었다. 깡마르고 애꾸인데다가 한쪽 다리마저 절었던 그는 나이 30살이 넘도록 뚜렷한 직업이 없었다.

봉상청은 제갈공명이 유비에 의해 발탁되는 것과 흡사하다. 단지 제갈공명은 유비를 3번 찾아가서 유비의 사람이 되지만 봉상청은 자진해서 고선지에게 자신을 시종으로 삼아달라고 수십일을 성문에서 농성한 끝에 발탁되는 차이가 있다. 그 후 유비의 제갈공명처럼 고선지의 봉상청이 됐는데 그 시작은 이렇다.

 

참모들이 똑똑해야 리더가 빛난다-봉상청의 삼고초려 (三顧草廬)

어느날 봉상청은 고선지에게 편지를 썼다. 고선지는 그가 보내온 편지를 보고 깜짝 놀라 고선지는 얼른 봉상청을 만나 보았으나 어찌나 못생겼던지 고선지는 부하가 되겠다는 봉상청을 잘 타일러 보냈다. 이에 좌절하지 않고 봉산청은 유창한 문장으로 편지를 써 보냈으나, 고선지는 아무런 회답도 하지 않자 봉상청이 직접 찾아왔다. 고선지는 그 자리에서 그를 꾸짖었지만 봉상청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계속 자신을 써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래도 고선지가 거부하자 봉상청은 이튿날부터 고선지의 집 앞에 버티고 먹는 것도 자는 것도 그곳에서… 그렇게 한 달 동안 버티는 봉상청을 보고, 고선지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고선지는 그의 끈기에 감동하여, 봉상청을 부하로 삼았다. 이후 봉상청은 크고 작은 전쟁이 있을 때마다 뛰어난 지략을 고선지에게 일러주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죽음까지 같이한 충심의 참모

얼마후 텐산산맥 서쪽 끝의 달해부를 점령한 고선지는 그의 상관 부몽영찰에게 승전보고서를 보냈다. 부몽영찰은 보고서를 보고 놀랬다. 명문장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승리의 소식과 함께 봉상청은 명문장가로 알려졌다. 고선지는 봉상청의 명문장 덕분으로, 안서 도호부로 승진하였다. 이어, 고선지는 사진 도병마사가 되었다.

그 이후로도 고선지는 봉상청을 지극히 신임했다. 비단 글씨와 문장 때문이 아니었다. 봉상청의 작전은 일찌감치 앞서려는 고선지의 작전을 일단 멈추게 하여 신중히 작전을 수립할 수 있도록 보조하였다. 그래서 고선지는 꼭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봉상청에게 의논하였고 단 1번을 제외하고는 온갖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었고 언제나 생사고락을 같이하였다. 훗날 고선지가 억울한 죽음을 당할 때도 봉상청은 고선지와 죽음까지 같이 하였던 것이다.

고선지의 역사적 재평가

결국 고선지는 이 한차례의 패전 때문에 4차 전승의 빛나는 전과는 상쇄되었고, 훗날 안록산의 반란 때 역신으로 무고 당하여 참형되었던 것을 두고 결과적으론 '횡포무도한 탐욕자'라는 부정적인 인물로 역사상 매도당했던 것이다.

죽음의 벌판인 타클라마칸(Taklamachan) 사막을 누비고 세계의 지붕인 파미르 고원을 넘나들면서 고선지는 세계 전쟁사에 전무후무한 전공을 세웠고, 소발률정벌을 위해 거의 반년에 걸쳐 힌두쿠시(Hindukushi)의 험로를 정복한 고선지의 위용에 대해 새로운 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이 지역을 실지 답사한 바 있는 저명한 영국의 탐험가 스테인(Stein)은 '현대의 어떠한 참모본부도 따를 수 없는 것이며, 나폴레옹(Napoleon)의 알프스(Alps) 돌파보다 더 성공적인 것' 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비록 몸은 당에 있었지만,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후손으로서 그 얼을 세계만방에 처음으로 드날린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탈라스 전투의 인류문화교류사적 의의

비록 전쟁사적 견지에서 볼 때 탈라스 전투는 일단 패배로 끝남으로 인해 고선지에게 큰 오점을 남겼지만 중세 국제관계사, 특히 동아 문화교류사의 시각에서 볼 때에는 중대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석국의 정벌 및 대식제국(아라비아 제국)과의 충돌은 아시아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당제국의 불교 및 유교문화권 대 신흥 아라비아의 회교문화권과의 충돌이다.

당과 이슬람 제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충돌은 결국 양대 세력이 파미르(Pamir) 고원을 경계로 중앙아시아를 양분한 가운데 상호 정치·문화적으로 교류·협력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탈라스 전투 이후 당나라와 아랍세력이 파미르 고원을 경계로 더 이상 분쟁 없이 정치·문화적으로 상호교류가 이뤄짐으로써 중세 동서교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영상]고선지 루트 3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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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2부

 
3부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윤복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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