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참역사

[스크랩] [일본=백제]일본천황들은 대대로 백제왕족들이 즉위해 왔다

기차니 2011. 6. 18. 09:46

 



[자료]일본천황은 백제인들이다

일본 천황가는 백제 근구수대왕이 태자시절에 일본열도를 통일하고 야마토왕조를
세운 백제 응신천왕(근구수대왕) 이후, 백제왕족에 의해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다.

 
 

역사는 유적과 유물을 남기는 법..
백제 무녕왕의 아들이였던 성왕의 얼굴을
형상화한 일본 호류사 몽전 '구세관음상' -일본왕실 주관으로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
백제의 법륜성왕이라 불리운 백제 성왕이다.

백제왕족 간무천황이 교또로 수도를 천도한 후에 [백제신사]를 세우고
백제개국시조가 되는 부여왕 구태를 비롯하여 근초고왕과 성왕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 백제를 해상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진
백제 근초고대왕이 바로 요동지역에서 한반도로 이주하여 백제를 개국하고
온조.비류세력(십제)을 통합한 부여왕 구태의 후손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백제 성왕은 일본 역사에서 성왕, 성명왕 또는 명왕으로 기록된다.
그리고 후에 흥명천황, 긴메이 덴노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일본으로
건너가 불교를 포교한 백제 성왕은 불교문화와 더불어 일본왕권을
유지하는 데 힘썼다.


호류사 몽전(夢殿)은 백제 위덕왕의 부왕(성왕)에 대한 고뇌에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일 년에 두 차례, 봄. 가을에 한 달씩 개방하는
이 곳 몽전에 일본 국보인 ‘구세관음상(救世觀音像)’이 있다. 나무로 조각하고
금박을 입힌 목조불상인데, 얼굴과 표정, 높이 180cm 크기까지 사람과 
동일하게 제작한 등신상이다. 머리의 쓴 화려한 보관 아래로
긴 머리카락까지 사람과 똑같이 조각되어 있다 한다. 

15세기 초에 호류사의 승려 성예(聖譽)가 남긴
『성예초(聖譽鈔)』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威德戀慕父王像 所造顯之尊像卽 救世觀音像是也」
“위덕왕이 부왕(성왕)을 연모하여 만들어서 나타낸 존상이 구세관음상이다.”

일본 국보로 보존되고 있는 호류사 몽전의 구세관음상에서
백제 성왕의 얼굴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신기할 뿐이다.
 

일본 '나라'에서 가까운 곳에 한국에서 온 천황들의 무덤이 가득한
'아스카' 지역이 있다.(오사카=아사하=해가 떠 오르다=아사달:아스카는
한반도에서 이주해 온 백제인들이 대거 정착한 지역이다.한성백제가 망할 때
개로대왕의 동생 곤지가 사마-훗날 무녕왕-를 임신한 개로왕의 왕비를
데리고 망명해 온 지역도 아스카 지역으로 아스카에 '곤지신사'가 있다.)'란 곳이 있다.

일단 킨메이 천황릉. 고바야시 야스코는 킨메이 천황 = 백제 성왕으로
불교를 처음 일본에 들여온 왕이라고 주장한다. 고바야시 야스코는
백제성왕은 거의 백제에 있으면서 일본의 통치는 백제로부터 온
귀족 '소가'씨(근초고대왕 당시 백제의 명장군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가 시조)에게 거의 맡겼다고 서술한다
.

한 몸이 여러 나라를 다스리려면 대리로 다스리는 신하가 필요했으리라.

킨메이 천황이 백제 성왕이 아니라는 반론에 대해 고바야시는
다음과 같은 추가 증거를 제시한다.

일본의 역사서 '서기'에 보면, 백제 성왕이 살해당한 후,
백제 성왕의 아들 '혜'가 성왕의 시신을 모시고 일본에 온다.

당시 왜가 숭앙하던 백제국 왕의 시신과 왕자를 응대한 것은
'코세노오미'와 '소가 이나메'로서 최고 대신들이긴 하나
일본 천황이 빠져있다. 즉 천황 부재란 이야기다.

'혜'는 백제성왕의 아들이나, 아버지 성왕이 죽고 다른 아들'여창'이
왕이 되자 일본에 건너온 것이다. 혜는 일본에서 일본을 다스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나, 소가 이나메는 "앞으로 어떻게 왜를
다스릴지.." 하며 탄식한다.

고바야시 야스코는 말한다. 백제 성왕이 죽었는데 옆나라 왕의
시신을 앞에두고 '소가 이나메'는 왜 일본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탄식인가? 백제 성왕은 일본의 킨메이천황이기 때문에
백제 천황이 죽음과 동시에 일본 천황은 공석이란 얘기다.

고바야시 야스코는 말한다 '아마도 백제의 왕자 혜는 천왕으로
일본을 다스리고 싶었겠지만,일본에서 성왕대신 대리 통치하던
백제 귀족 '소가'집안은, 백제부흥의 명분을 내세워 왜국 병단을 딸려
혜를 백제로 밀어냈던 것이다.'

그 후, 백제 성왕이 죽었음에도 '소가 이나메'는
천황의 죽음을 천명하지 않고 계속 다스린다.

그러나 서기 570년에 '소가 이나메'가 암살 당한후,
이듬해인 571년에야 일본 서기에서는 킨메이 천황의 왕조가 끝났다고 서술한다.

아스카에는 당시 잘나가던 소가씨의 고분도 있다. 또한 소가씨에 의해
건조된 아스카테라(아스카사)는 그 규모가 호류지의 세배, 건축기간은
20년으로 당시 한반도의 가람배치 양식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이
최근의 터 발굴조사에서 밝혀졌다.

고바야시 야스코의 실증에의한 5-8세기 경 천황 가계도 일부를 보자.

6세기 초 킨메이 천황 즉위(백제 성왕)

6세기말(593년) 쇼토쿠 태자 섭정 시작(백제 법왕)
백제 법왕은 주로 백제에 머물며 일본을 통치

8세기초 칸무천황 즉위, 나라에서 교또로 천도
(칸무천황의 어머니는 백제 무녕왕의 후손의 여성-고야 신립)

 
호류사 백제 관음상(동양의 비너스).일본국보 


백제관음상

[동영상 자료]일본천황이 된 백제인들


[일본사 편수회]일본열도의 근구수왕 후손들이
모시는 신사가 응신천황(근구수대왕)신사다.

왜와 친선을 다지고 왜를 적극 도운 근초고왕을 시점으로

한반도백제인들이 대거 이주하여 정착한

오사카에는 백제 근구수대왕의 후손이라는 3가의 신사가 있다.

오진大津신사와 가라쿠니辛國신사, 국분國分신사다.

여기서 오진大津신사는 오진應神천황과 관련되니 바로 근구수대왕이었다.

응신應神을 오진이라고 읽는다.

근구수대왕과 신공황후가 왜 일본인들에게
나란히 불상으로 섬김을 받고 있으며,
일본지폐에 신공황후를 새겨서 일본을 대표하는
시왕모인양 떠 받들어 대는 것일까?

그것은 마한.가야.신라를 정벌한
근구수대왕의 후비가 왜왕의 왕후로
왜여인 출신인 신공황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초고왕 시기에 실현한
마한.가야.신라정벌을 마치
당시 연대기에 맞추어 신공황후가
정벌하여 백제에게 준 것 처럼
한반도와 인연을 단절한[일본서기]에
기록하여 혼란을 준 것이다,
당시 왜의 군사력으로는
마한.가야.신라를 정벌한 능력자체가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백제 근구수대왕은 태자 시절에,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열도를 통일하고
야마토왕조를 세워 362년에 응신천황이 되고,


왜 여인인 야가하에히메를 취하여
신공황후로 삼고, 야가하에히메가 
근구수대왕의 아들을 임신하니 인덕천황으로

태중에서 삼한왕, 즉 대마도왕으로 임명하고

5세에는 왜왕으로 임명한다.
근초고왕 시기에 부여구수 태자가
칠지도를 만들어서 보낸 대상은 바로
신공왕후가 낳은 근구수대왕의 아들인 셈이다.


「泰(  ) 4년 5월 (  )일 정오에 여러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여러 병란을 물리칠 수 있으므로, 후왕(侯王)에게 주어 후왕이
편안하도록 함이 마땅하다..중략..전에는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에게 
진기(珍奇)한 칼이 생겼기에, 성음(聖音)께서 (그것을 보시고) 일부러
왜왕(倭王)을 위하여 만들었다는 뜻을 후세까지 전하여 보여라.」


칠지도에 기록된 연호 '태화'..백제의 정복군주 근초고대왕의
연호로 추정할 수 있다. 일제군국주의가 정복한 아시아 지역은
백제가 경영한 담로지역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은 지금의
일본이 백제라는 사실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식민지와 점령 지역을 주황색 선과 면으로 표시했다.

근구수대왕은 백제로 돌아가서
고구려의 침략에 맞서
고구려 남평양성(북한 평양성)에 달려가
고국원왕을 전사시켰고

마침내 백제대왕이 되었다가
신라여인 아이부인(왕후)으로부터 낳은
침류왕에게 왕위를 물려 주고

383년에 다시 일본으로 가서
일본열도를 통일한 야마토왕조의
개국시조로서 응신천황이 되었다.
근구수왕이 백제왕을 하고 있을 때
신공황후는 아마 근구수대왕을 대신해서
섭정을 하고 있었겠지요? 그래서 일본사에서
신공황후의 위상이 높아진 이유일 겁니다.

오진大津신사의 기록; 特に百濟の貴須王の子孫と言われる葛井氏、船氏、
津氏の三氏族が勢力を扶植していった。葛井氏は藤井寺市藤井寺の辛國神社、
船氏は柏原市國分市場の國分神社、津氏は
社(=大津神社)とそれぞれ祖

を祭っているようだが、明治以後であろうか素盞嗚尊や牛頭天王
を祭る形になっている。

 

스미요시대사신대기住吉大社神代記에서
스미요시 대신과 신공황후의 사통私通의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근구수대왕을 구수貴須라고 기록하였는데,
스미요시住吉 중의 뒷글자 길吉 한 글자 발음인 기사가
“貴地”와 같은 발음도 되거니와 吉을 기츠라고 읽을 수도 있다.
또 그 앞에 근(近; 큰-)을 구운炭의 의미로 적었다가
스미炭로 읽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근구수대왕을 위한 신사는 스미炭궁이어야 하는데,
같은 발음으로서 스미궁隅宮이라고 기록되었다.
응신천황, 즉 근구수대왕이 서거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는
오스미궁大隅宮은 본래 스미(炭, 隅) 요시(吉, 貴須),
즉 근구수대왕을 기린 궁이다.











 

근구수(응신)천황 아들인 인덕천황릉

 

응신.인덕천황릉에서 출토된 청동거울.환도대도가 백제유물이고

응신천황이 입고 있는 의상이 백제의상인데 자꾸 헛소리하면 안 된다.


응신천황 옆에 있던 인물이 백제인 아직기이고, 응신천황의 아들

인덕태자의 스승이 아직기 추천으로 일본열도로 온 왕인박사다!


대경(宜子孫獸帶鏡)                  일본 인덕왕릉 출토,수대경(獸帶鏡)
공주국립박물관 소장                           미국 보스턴박물관 소장



백제 무령왕릉 출토, 환도대도    일본 인덕왕릉 출토,용문 환도대도
공주 국립박물관 소장    미국 보스턴박물관 소장 



일본의 문자를 창안하고 보급한 백제인 왕인 박사
왕인박사는 일본왕실의 요청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한자를 보급하고 한자의 핵심부수만 빼서 문자를
개발하여 보급하니 현재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일본문자다
일본인들은 왕인박사를 일본어의 아버지라 칭하고 있다


일본천황가 계보의 실체

 

천황공백기(天皇空白期:248-390) - 142년간




백제옷을 입은 노년의 응신천황(근구수왕의 말년?)


백제 제14대 근구수왕 375~384  재위기간 9년

 

15. 오진[應神(응신) : 390-400] - 百濟人

16. 닌토쿠[仁德(인덕):313-399] - 오진(應神)천황의 아들

17. 리츄우[履中(이중):400-405] - 任那聯政時代 大和地方 소규모 聯盟王

18. 한제이[反正(반정):406-410] - 〃

19. 인교오[允恭(윤공):412-453] - 〃

20. 안코우[453-456] - 〃

21. 유우라쿠[雄略(웅략):457-479] - 〃

22. 세이네이[淸寧(청령):480-484] - 〃

23. 겐조오[顯宗(현종):485-487] - 〃

24. 닌켄[仁賢(인현): 488-498]

25. 부레츠[武烈(무열):498-506]

26. 게이타이[繼體(계체):507-531] - 百濟 무령왕(武寧王)의 동생

27. 안칸[安關(안관):531-535] - 게이타이(繼體)천황의 장남

28. 센카[宣化(선화):535-539] - 게이타이(繼體)천황의 차남

29. 긴메이[欽明(흠명):539-571] - 百濟 성왕(聖王)

30. 비다쓰[敏達(민달):572-585] - 百濟王族. 스이코(推古)천황의 남편

31. 요메이[用明(용명):585-587] - 스이코(推古)천황의 오빠

쇼오토쿠태자(聖德太子) - 요메이(用明)천황의 둘째아들. 攝政

32. 스순[崇峻(숭준):587-592] - 스이코(推古)천황의 오빠

33. 스이코[推古(추고):592-628] - 요메이(用明)천황의 여동생

34. 죠메이[舒明(서명):629-641] - 비다쓰(敏達)천황의 손자

35. 고교쿠[皇極(황극):642-645] - 죠메이(舒明)천황의 황후

36. 고토쿠[孝德(효덕):645-654] - 고교쿠(皇極)천황의 동생. 大化改新

37. 사이메이[齊明(제명):655-661] - 百濟 의자왕(義慈王)의 여동생

38. 텐지[天智(천지):661-671] - 죠메이(舒明)천황의 아들

39. 고오분[弘文(홍문):671-672] - 텐지(天智)천황의 아들. 오오토모皇子

40. 텐무[天武(천무):673-686] - 텐지(天智)천황의 동생. 오오아마皇子

41. 지토[持統(지통):690-697]

42. 몬무[文武(문무):697-707]

43. 겐메이[元明(원명):707-715] - 헤이죠쿄(平城京)로 이전(710)

44. 겐쇼오[元正(원정):715-724]

45. 쇼오무[聖武(성무):724-749]

46. 고오켄[孝謙(효겸):749-758]

47. 준닌[淳仁(순인): 758-764]

48. 쇼오토쿠[稱德(칭덕):764-770] - 고오켄(孝謙)천황과 동일인물

49. 고오닌[光仁(광인):770-781]

50. 간무[桓武(환무):781-806] - 母는 百濟朝臣 和乙繼(武寧王후손)의 딸

51. 헤이제이[平城(평성):806-809]

52. 사가[嵯峨(차아):809-823]

53. 준나[淳和(순화):823-833]

54. 닌묘오[仁明(인명):833-850]

55. 몬도쿠[文德(문덕):850-858]

56. 세이와[淸和(청화):858-876]

57. 요오세이[陽成(양성):876-884]

58. 고오쿄오[光孝(광효):884-887]

59. 우다[宇多(우다):887-897]

60. 다이고[醍酷(제혹):897-930]

61. 스자쿠[朱崔(주최):930-946]

62. 무라카미[村上(촌상):946-967]

63. 레이제이[冷泉(냉천):967-969]

64. 엔우우[圓融(원융): 969-984]

65. 가잔[花山(화산):984-986]

66. 이찌죠오[一條(일조):986-1011]

67. 산죠오[三條(삼조):1011-1016]

68. 고이찌죠오[後一條(후일조):1016-1036]

69. 고스자쿠[後朱崔(후주최):1036-1045]

70. 고레이제이[後冷泉(후냉천):1045-1068]

71. 고산죠오[後三條(후삼조):1068-1072]

72. 시라카와[白河(백하):1072-1086]

73. 호리카와[堀河(굴하):1086-1107]

74. 도바[鳥羽(조우):1107-1123]

75. 스도쿠[崇德(숭덕):1123-1141]

76. 고노에[近衛(근위):1141-1155]

77. 고시라카와[後白河(후백하):1155-1158]

78. 니죠오[二條(이조):1158-1165]

79. 로꾸죠오[六條(육조):1165-1168]

80. 다카쿠라[高倉(고창):1168-1180]

81. 안토쿠[安德(안덕):1180-1185]

82. 고도바[後鳥羽(후조우):1185-1198]- 가마쿠라(鎌倉) 幕府

83. 쯔지미카토[土御門(토어문):1198-1210]

84. 준토쿠[順德(순덕):1210-1221]

85. 츄우쿄오[仲恭(중공):1221-1221]

86. 고호리카와[後堀河(후굴하):1221-1232]

87. 시죠오[四條(사조):1232-1242]

88. 고사가[後嵯峨(후차아):1242-1246]

89. 고후카쿠사[後深草(후심초):1246-1259]

90. 카메야마[龜山(구산):1259-1274]

91. 고우다[後宇多(후우다):1274-1287]

92. 후시미[伏見(복견): 1287-1298]

93. 고후시미[後伏見(후복견):1298-1301]

94. 고니죠오[後二條(후이조):1301-1308]

95. 하나조노[花園(화원):1308-1318]

96. 고다이고[後醍酷(후제혹):1318-1339]- 무로마치(室町) 幕府

97. 고무라카미[後村上(후촌상):1339~1368]

98. 쵸오메이[長慶(장경):1368-1383]

99. 고카메야마[後龜山(후구산):1383-1392]

100. 고고마츠[後小松(후소송):1392-1412]

101. 쇼오코오[稱光(칭광):1412-1428]

102. 고하나조노[後花園(후화원):1428-1464]

103. 고쯔지미카토[後土御門(후토어문):1464-1500]

104. 고카시와바라[後柏原(후백원):1500-1526]

105. 고나라[後奈良(후내량):1526-1557]

106. 오호기마찌[正親町(정친정):1557-1586]

107. 고오오제이[後陽成(후양성):1585-1611]- 에도(江戶) 幕府

108. 고미즈노오[後水尾(후수미):1611-1629]

109. 메이쇼오[明正(명정):1629-1643]

110. 고코오묘오[後光明(후광명):1643-1654]

111. 고사이[後西(후서):1654-1663]

112. 레이겐[靈元(영원):1663-1687]

113. 히가시야마[東山(동산):1687-1709]

114. 나카미카토[中御門(중어문):1709-1735]

115. 사쿠라마치[樓町(누정):1735-1747]

116. 모모조노[桃園(도원):1747-1762]

117. 고사쿠라마치[後樓町(후누정):1762-1770]

118. 고모모조노[後桃園(후도원):1770-1779]

119. 고오카쿠[光格(광격):1779-1817]

120. 닌코오[仁孝(인효):1817-1846]

121. 고오메이[孝明(효명):1846-1866]

122. 메이지[明治(명치):1867-1912]

123. 다이쇼[大政(대정):1912-1926]

124. 쇼와[昭和(소화):1926-1989]

125. 헤이세이[平成(평성):1989-현재]

 

[특강자료]철저한 고증으로 파헤친 <일본은 백제다>



* 강사:홍윤기 교수(일본백제사 전문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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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윤복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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