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참역사

[스크랩] 일본 천황가에서 모시는 ‘한신(韓神)`과 아지매는?

기차니 2012. 1. 30. 20:33

단칼에 가슴 베여

이승과 저승 사이 흐르는 핏줄은
얼마나 깊고 넓은가!

“보고 싶다” 라고 하늘에 쓰면
콸 콸 소리쳐 솟구치는 뜨거운 피

0시의 흑암속에 백제의 후예
현세를 걸어 잠근 왕궁의 문들

자지러지는 그리움
몸부림치는 몸춤으로

“아지매 오오오 오게” 불러 모시는
그 애절함에 간이 녹아 내리네

그 기별 전해진 듯
하늘에는 천둥번개 바다에는 물기둥

단칼에 가슴 베여 아물지 못하는
이 불면의 깊은 뜻

바람은 소리치네 깨어나라고
덕을 베푼 순한 핏줄 깨어나라고

-시인 추 영 수-

일본 속에는 한민족 역사의 발자취가 뚜렷하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 하나 찾아 내어 한국사를 훌륭하게 보완해야만 한다. 한국 시인들도 오랜 나날을 두고 해마다 일본 현지로 민족사 탐방과 동시에 훌륭한 시를 써서 한국문단사를 빛내고 있다.

중진 추영수 시인은 일본의 역사 현장 연구 답사에서 고대 백제인들의 눈부신 발자취를 빼어난 역사시로 밝히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보고싶다” 라고 하늘에 쓰면/ 콸 콸 소리쳐 솟구치는 뜨거운 피/0시의 흑암속에 백제의 후예/ 현세를 걸어 잠근 왕궁의 문들/자지러지는 그리움/ 몸부림치는 몸춤으로/ “아지매 오오오 오게” 불러 모시는/ 그 애절함에 간이 녹아 내리네 하는 이 뜨거운 민족 이미지.

실은
“아지매 오오오 오게” 하는 것은 일본왕실에서 천황이 해마다 11월 23일 저녁에 가을 제사로서 조선여신 ‘한신’(韓神) 에게 햇곡식으로 빚은 신주를 올릴 때의 축문이다. 이 사실은 지난 8월 18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국학원’ 주최 ‘한중일 국제천손학술대회’에 온 일본도쿄 천황궁 제사 담당관 아베 스에마사 악장이 강연에서도 확실하게 증언했다.(홍윤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 석좌교수)

 

일본 천황가가 제사를 지내는 ‘한신’(韓神)은 한반도 태양신이고 '아지매'는 마고다

'아지매'는 경상도 사투리로 신라인들이 주로 일본신관들이 되어 제사를 주관했기 때문에 아지매로 표현된 것이다. 백제인들이 열도로 건너가기 전에 신라인들과 가야인들이 단군조선시대부터 당골래 마고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마한인들이 살고 있는 일본열도로 이주했는데, 이 때 신라인들이 제사를 담당하고 가야인들이 왕권을 담당했다.

[후한서]"韓은 동과 서로 바다로 둘러 싸여 있고 사방이 4천리다. 마.번.진한 3한이 있는데 마한이 가장 크다. 韓의 진왕과 韓의 모든 왕들은 마한의 혈통으로 삼는다..마한에는 소도가 있는데 죄인이 소도로 들어 오면 잡아 가지 못하며, 각 읍마다 천군을 뽑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韓神이란 한반도 신을 의미한다. 한반도에서도 주로 농경지역인 남한지역(남3韓)을 의미하기 때문에 '해'다. 그리고 그 韓神을 섬기는 여성 아지매는 당골래 마고다. 남3한 중에 삼한를 대표하는 마한에 해당하는 서남해 지역이 마고지역이기 때문에 당연히 마고가 되는 것이다. 서해에서 출항할 때 제사지낸 대상이 여신으로 신격화된 마고 할미였다.



그리고 마고지역(서남해)에서 북쪽의 천산이 있는 요하지역으로 이주하여 마고한국문명을 남긴 황궁씨가 여신상(위 사진)과 여신전을 남겼으니 바로 마고여신상이다. 요하지역은 당시 모계문화를 가진 여왕국이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천황가에서 '아지매'로 부르는 여신韓神은 당골래 마고가 되는 것이다. 마고시대의 유적.유물은 현재 서남해 바다 속에 깊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백제가 망한 이후 마한열도로 건너 간 백제황족은 한반도와 인연을 끊고 백제사를 일본열도 중심사관으로 [고사기][일본서기]를 기록했고, [속일본기]는 백제황실차원에서 사실적으로 기록한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속일본기]야 말로 백제사의 진실을 담고 있다.

[고사기]에는 고천원(신들의 고향=한반도)에서 천조대신 등이 벼이삭을 가지고 큐슈(구주)지역으로 강림(이주)한다. 그리고 가야계 신무천황이 일본의 1대 왕이 된다. 신라세력 스사노미는 일본열도를 정벌하여 신들에게 제사지내는 신관업무를 담당하겠다는 조건으로 가야계 신무천황에게 정벌한 땅을 이양한다.

[고사기]에서 고천원은 고령가야 지역을 의미한다.천조대신은 마한의 마고신앙을 의미하며,벼이삭은 한반도농경기술을 의미한다.오사카 지역에 세운 나라는 바로 한반도 지역에서 사라진 가야를 의미한다. 이후 한반도 가야가 의지했던 백제가 일본왕실을 대신하여 오늘날 일본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는 본국백제가 망한 후에 국호를 바꾸어 다시 태어난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음양 두 신이 만나서 '담로'를 시작으로 일본을 열었다"고 시작된다./윤복현 분석정리

일본문명사는 한반도문명사의 줄기/일본왕실 지배세력:마한=>가야=>백제

[일본문명사 개요]일본민족형성의 기원은 "일본 야요이문화는 한반도의 삼한.삼국인들이 벼농사,금속문화,견고한 토기 등의 새 문물을 가지고 진출해 조몬인을 물리치고 정착하면서 전파했다"는 게 정설이었다. 이는 아이누족이 현재 일본의 소수종족으로 북쪽 끝 홋카이도와 남쪽 끝 오키나와에 분산돼 있는 것으로도 입증된다.
 
일본 민족 형성의 기원은 인구동태를 살펴보면 더욱 확연해진다.인류학 권위자인 일본 국립 민속학박물관의 고야마슈조 교수는 1984년 일본인류학회에 보고한 "죠몬시대의 인구"라는 논문에서 "죠몬말기(기원전 약 3세기) 일본 총인구는 극심한 추위 등의 영향으로 겨우 7만5천8백명에 불과했고,그후 야요이시대에 접어들자 59만4천9백명으로 급격히 늘었으며,하지키(김해 토기)를 사용한 나라시대(710~784)에는 무려 5백39만9천8백명으로 증가했다"고 밝혔다.인류학자 중 세리자와 죠수케씨는 죠몬말기의 인구를 약 12만명,야마우치 세이오씨는 약 15만명으로 추계했다.
 
이로 미뤄 야요이시대 초기에 일본 인구가 급증한 것은 고대 한국인이 한반도에서 대거 진출,벼농사로 식량이 풍부해졌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구주(규슈)에는 지명 유적 전설 신앙에 이르기까지 온통 "가라""가야"와 인연깊은 흔적이 무수히 깔려있다.고대 가라인들이 진출한 증거물들이다. 일본의 정사라는 [일본서기]는 천손강림으로 시작한다."니니기노미코토가 휴가규슈)의 구시후루다케에 강림하여 가라구니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을 찾았고, 마침 가고시마현 남쪽 끝 아다에 자리 잡아 구야국을 설립했다"는 내용이다. 
 

▲일본 구주지역 가야유물.왼쪽것은 그릇이라기 보다는 완전한 형태의 조각품으로 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오른쪽 것과 비교해 보면 원래의 용도가 그릇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역시 부장품으로 생각되며, 일본인들의 신고 다니는 신발을 연상시킨다. 이것을 보더라도 가야의 문화가 일본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규슈에는 일본 최초의 궁궐 터가 남아있다.이곳에서 세력을 강화한 가야인 후손이 일본 중심지역인 나라지방을 정벌하여 일본1대 천황 신무천황이 되었다고 전한다. "구시후루"는 김수로왕이 강림했다는 구지봉과 같은 어원이며 구야국은 김해 금관가야국(가락국)의 전신이다.

 

김해김씨 족보에 수로왕의 왕자 10명 중 7명이 하동 칠불사에서 수도한 후 구름을 타고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같은 시기인 2세기경 남규슈 가고시마 유적에 시치구마라는 지명이 있다.지금은 많이 파괴되었지만 7명의 지배자가 웅거했다는 유적이 있다. 가야신을 모시는 7개소의 신사도 있고 7왕자를 주신으로 모신다.인근에는 가라구니우즈미네신사 등 "가라"명칭을 붙인 신사들이 많다.이 지방 향토사학자들은 "옛날부터 가야국 7명의 왕자가 이곳에 군림하여 세력을 뻗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일본왕가의 사학자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씨는 "일본신화는 가야신화와 흡사하며 연고가 깊다"면서 가야인이 천황가문의 조상임을 간접적 긍정한 바 있다.
 
일본 개국왕 진무천황의 증조부가 바로 수로왕의 왕자들인 것으로 비정하는 일본사학자도 있다.당시 남규슈는 가야계가 점거하고 신라계 여왕설의 히미코는 북규슈에 자리 잡았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북규슈 후쿠오카 남쪽 세부리산 너머의 사가현 요시노가리의 야요이시대 유적은 일본역사를 바꿔 써야할 만큼 유명하다.가야식 옹관묘와 지석묘,가야유물과 동질인 토기,동검,곡옥 등 귀족들의 장식품,동경,무사들이 착용한 판갑옷,투구,말머리가리개,말안장까지 출토됐다.
 
유물중에서 가장 진귀한 것은 파형동기이다.이것을 만든 거푸집(주형)도 출토돼 일본 사학자들도 놀랐다.파형동기의 수수께끼를 풀면 북규슈일대에 대한 가야국의 지배 여부를 명확히 파악하게 된다.파형동기의 파는 태양의 불꽃형상이며 권위의 상징이다.김해의 수로왕릉 정문에도 파형문양이 부착돼 있다.따라서 규슈유적에서 파형동기가 출토된 것은 당시 그곳에 수로왕의 왕자나 수령급 집단의 군대가 있었다는 증거물일 것이다.

수로왕릉의 파형문양은 9개파,요시노가리 것은 7개파에 불과하다.파수가 많은 것은 상위자의 의미를 갖는다.요시노가리 파형동기의 파수가 적은 것은 분국임을 추정할 수도 있다.
 
더욱이 거푸집이 출토된 것은 파형동기를 대량 제작한 증거이며 규슈에 가야국 예하의 왕자급 집단이나 군사력이 엄청났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에가미 나미오박사가 주장한 고대한국의 기마군단이 일본 중부지역을 정벌했다는 기마민족정복설과 합치되기도 한다.
 
일본 고대사 고사기에 요시노가리일대를 말로국이라 했다.경남 밀양고을이 말라국이었다.말라국의 호칭이 말로국으로 변화했다는 것은 정설이다.따라서 가야시대에 밀양출신들이 먼저 점거했음을 짐작하게 된다.
 
또 일본서기에 남규슈 사츠마지방을 졸마국이라 했다.삼국사기에 졸마국은 경북 김천군 조마면으로 명시돼 있다.고령 대가야의 성읍국이었던 김천 졸마국 출신의 터전이었던 모양이다.

서기 612년 백제계로 추정되는 마려자 왕( 왕)이 오사카의 가와치에 만법장원 사찰을 창건했으며 681년 기타가쓰라기군으로 이전하면서 당마사로 개칭했다.당마는 당초 당마에 연유,백제전신 마한의 뿌리라는 뜻이기도 하다.기타가쓰라기군은 660년 백제멸망 전부터 존재했다.나라시대(710~784년)에 당마사의 보수 자료를 보면 동탑과 서탑으로 구성되어 있는 등 백제불교 양식이다.이 사찰에는 당마만다라불화(국보)가 전한다.불화 역시 전남 승주군 송광사의 불화(탱화)와 같은 계열이다.
 
이 무렵 왜국으로 망명해 간 백제인들은 백제 전신인 마한을 백제의 뿌리로 삼으려는 인식으로 당마사를 창건,백제불교의 명맥을 계승하려 했다.그런데 이 당마사에는 백제 신라 고구려 승려도 합류했던 흔적이 많다.신라가 일본열도내의 한삼국세력을 통합하려 했던 움직임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백제사학자 오노야스마로려)가 "백제계 일본"체제를 구상하여 백제편중의 역사서 "고사기"(712년)를 다시 쓰게 됐다.이에 가야 신라계의 반발로 8년후 "일본서기"(720년)를 다시 쓰게 됐다.이러한 역사서 찬술을 계기로 왜국은 백제인에 의해 "일본"으로 국호를 개칭하여 신라와 등지고 독자적인 체제로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사학계의 "일본"국호와 천황제도가 천무천황때부터 시행됐다는 학설은 "일본서기"의 개작에 의한 것으로 정당하지 않다.

▲ 일본 백제사터 근처에 있는 백제화물역


백제왕신사 설명판

 

일본학자들은 "일본"국명이 서기 607년에 제정했다고 주장한다.이해 야마토국이 수나라 양제)에게 오노이모코를 사절로 보낼 때 "해 뜨는 곳 천자일본왕)가 국서를 보낸다"는 글귀를 썼다고 해서 이를 근거로 내세운다.그러나 오노이모코가 가져간 국서는 수 양제로부터 "무뢰한 야만인의 문서"라며 문전축출당했다.일본은 이러한 사실을 숨기고 억지주장을 펴는 것이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660년 멸망하자 663년 열도의 백제담로왕조는 백제 복국을 꾀하며 왜지에서 대군을 편성,부여 백마강(백촌강)으로 진격 항쟁했으나 전멸당했다.이때의 출전군을 "왜군"이라고들 하지만 실은 엄연한 "왜지의 백제인"이었다.
 
668년 고구려마저 멸망함에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이 대거 왜지로 피난,망명해 갔다.왜지의 "백제담로왕조"는 고국에서 몰려 든 백제인들을 중신들을 요직에 등용했다.30여년이 흐르면서 본국백제가 사라졌기 때문에 독자적인 행보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어 국호를 일본으로 바꾼 것이다. 
 
그 동안 삼한삼국세력이 부침했던 나라지방은 702년의 국명제정을 고비로 통합,정돈을 서둘러 710년부터 "나라사대"를 열었다.이에따라 712년 "고사기",720년 "일본서기"를 편찬하는 등 인식전환과 정치기반을 형성해 나갔다.일본사학자 추나노 요시히코씨도 "7세기이전에는 일본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역설했다.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윤복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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