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참역사

[스크랩] [茶山 이야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

기차니 2008. 10. 22. 07:44

 

 

 

 

 

제112호 (2008.10.2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


김 문 식(단국대 사학과 교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평가가 가장 뚜렷하게 차이를 보이는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침략 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침략자이지만, 일본인이 볼 때에는 조선을 정벌하여 일본의 국위를 선양한 전쟁 영웅이 되기 때문이다. 도요토미는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동아시아 세계를 정복하는 지배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었는데, 식민지 쟁탈이 치열하던 20세기 초에  그의 야망은 새로운 조명을 받기도 했다.


1592년 5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시 그의 조카는 관백(關白)에 임명되어 수도인 교토에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태합(太閤)이 되어 규슈의 나고야(名護屋) 성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 무렵 한반도에 진출한 도요토미의 군대는 승리를 거듭하면서 서울을 함락시키고 평양을 향해 북진하고 있었는데, 도요토미는 최종 승리를 확신하며 조선으로 건너갈 것을 결심하고 있었다.


“중국, 조선에 일본 천황과 관백을 배치해 다스리겠다”


편지에서 그는 4월 22일에 조선의 수도를 점령했음을 알리고, 이번에는 중국까지 정복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는 당시 세계를 나누어 가진 나라는 일본, 중국, 인도 세 나라인데, 자신에게 대항할 만한 나라가 없으므로 자신이 세계를 제패할 것이라고 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전쟁 이후를 구상하면서, 조선과 중국을 정복하게 되면 일본의 천황을 북경으로 옮겨 영국(領國)을 주고 조카를 중국의 관백으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일본의 천황에는 두 친왕(親王) 가운데 한 사람을 임명하고, 일본의 관백에는 하시바 히데야스(羽柴秀保)나 우키다 히테이에(宇喜多秀家)를 임명하며, 조선의 국왕에는 하시바 히데카쓰(羽柴秀勝)를 임명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도요토미는 동아시아 삼국을 점령한 다음 일본의 천황과 관백들을 배치하여 다스리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은 이내 좌절되고 말았다. 그의 군대는 평양성을 함락시켰지만 조선의 수군과 의병의 공세에 밀려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고, 자국으로의 침략을 우려한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면서 남쪽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59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전쟁이 끝났고, 일본 내에서는 그의 정적이었던 도쿠가와(德川) 가문이 집권하면서 그를 따랐던 세력이 급속하게 와해되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집권이 지속되는 동안 도요토미의 야망은 영원히 잠든 것처럼 보였다.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고 대외적으로 팽창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은 되살아났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발발하는 동안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에 관한 연구가 붐을 이루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은 한반도의 고대국가들을 복속시켰다는 진구(神功) 황후의 신화와 함께 일본인이 재현시켜야 하는 꿈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20세기의 한일 합방과 만주 침략은 진구 황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완성시키지 못한 야망을 후손들이 실현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우호 교류를 기억할까? 무력 충돌을 기억할까?


지난 여름에 필자는 규슈 히젠(肥前)에 있는 나고야 성을 방문했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에서 소집한 16만 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선과 중국을 공격하는 전쟁을 진두지휘했던 곳이다. 나고야 성터에서는 성지를 발굴하는 조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인근에 세워진 나고야성 박물관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하는 동안 발급했던 고문서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또한 박물관의 상설전시장에는 2천년에 걸친 한일 교류사를 개관하는 전시물이 있었는데, 조선시대의 통신사 관련 자료가 주종을 이루었다. 방문객 중에는 일본인이 많았지만 한국인도 눈에 띄었는데, 특별히 한국인 안내원도 배치되어 있었다.


전시실을 둘러보는 동안 필자는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방문객들은 통신사로 대변되는 양국의 우호적 교류를 주로 기억할까? 아니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대변되는 무력 충돌을 기억할까? 일본을 방문할 때면 필자는 늘 생각이 복잡해진다.


 


글쓴이 / 김문식

·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 저서 : 『조선후기경학사상연구』, 일조각, 1996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문헌과해석사, 2000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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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도르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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