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스크랩] 죽기전에 봐야 할 교토의 정원 베스트 11 -4부

기차니 2009. 2. 6. 14:26

 

 

일본은 이제 슬슬 매화가 필 시절입니다.

일본여행 동호회에는 어떤 분이 간사이지역 매화명소를 올리기도 하셨더군요.

 

봄이 오긴 오나 봅니다. 위 사진은 고다이지 매화풍경입니다.

 

지겹게 끈 시리즈도 이제 끝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많이 보아주셨는데, 갈수록 호응도가 떨어지네요^^

역시 부족한 글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솔직히 객관적인 설명을 할 수는 있지만, 좀 감성적인 표현은 떨어지는 편입니다. 그래서 설명이 딱딱한 것 같아 보이고요.

원래 문학책을 많이 읽어야 표현이 풍부한데, 워낙 역사서만을 좋아하는 성격이라서요.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에게 다시 감사드리며, 당치도 않은 제목으로 이목을 끌려 했던 점은 사과드립니다.^^

 

다음에는 일본정원을 보는 방법을 올릴 생각입니다.

내용이 더욱 딱딱해 질것 같아 걱정이네요...

 

 


 

 

10. 고다이지 (高臺寺)

 

고다이지를 한 세번정도 방문했지만, 참 다양한 풍경을 저에게 주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가을 낮에 한번, 가을 밤에 한번, 그리고 봄에 한번.. 모두 다른 정취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올리게 되는 사진은 처음 DSLR을 사서 별다른 연습없이 찍던 시절의 것이어서 많이 부족합니다.

역광에 구도도 엉망, 기울어지고.. 사진을 다 망쳤죠.

 

이곳은 가을에 다시 가서 제대로 찍어봐야 할 곳으로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고다이지는 이상할 정도로 한국관광객이 적은 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유는 애매한 위치에 있어서 인가 합니다.

야사카진자와 마루야마 공원 바로 밑에 위치하는 고다이지는 결국 기요미즈데라를 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니면 그 반대로 기요미즈데라에서 마루야마를 거쳐 치온인으로... 지나가다가 거대한 영산관음 한번 보고.. 그곳을 고다이지로 잘못 아시는 분도 있더군요..

 

치온인이 거대한 불전과 황당한 불가사의를 가지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기요미즈데라가 높은 무대와 주변의 기념품점으로 이목을 끌지만, 이 고다이지는 이런 번잡한 구역에서 차분하게 교토 본래의 멋을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사실 불가사의 한번 찾으면 끝이고, 기념품점도 몇번 보면 질리죠. 그런 면에서 이 구역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고다이지의 배관코스는 서서히 강도를 더해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처음 매표소에서 입장하면 약간 언덕에 위치해서 교토를 조망할 수 있고, 참배로 주변에는 조그만 묘지들이 보입니다. 그러다가 코너를 돌면 위의 다실이 나오죠. 이곳을 벗어나면 살짝 대표 정원이 보이다가 방장안으로 들어가서 방장정원을 감상하고 복도를 따라 나오다가 아까의 정원을 감상합니다. 방장을 나와 본격적으로 개산당(開山堂) 주변의 호수정원을 감상하다가 언덕을 올라 다시 다실을 보고 대나무숲속을 지다면서 밖으로 나옵니다.

 

이것이 의도적인 것인지, 아니면 저만 그렇게 느끼는 지는 몰라도 참 효과적으로 배치한 것 같습니다.

특히 마지막의 대나무숲의 박력은 대단합니다.

다들 아라시야먀의 대나무숲 길이 좋다고 하시고 그곳의 사진을 자주 올리시는데, 물론 그곳도 좋지만 너무 인위적인 맛이 나는 직선도로일 뿐입니다. 그에 비해 고다이지의 대나무숲길은 진짜 숲을 걷는 듯이 기복도 있고 오르내림도 있습니다. 그냥 무릉도원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입니다. 그러다가 밝은 빛에 이끌려 나오면 고다이지의 정원이 다시 펼쳐지죠..

 

 

 

고다이지는 치센카이유 정원과 카레산스이 정원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연못을 끼고 있는 정원은 아마 창건당시의 것으로 그 유명한 고보리엔슈의 작품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고보리엔슈가 만들었다는 정원이 정확한 것이 몇개 없습니다. 다 설뿐이죠.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 사람이 전문 작정가가 아니었고 그래도 공무원^^이었습니다. 그것도 부교(奉行)라는 고위 관료였습니다.

그래서 손을 댄 것은 많지만 완성까지 직접 한 것은 얼마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후대에 와서 정원을 고보리엔슈가 작정했다고 하면 인기가 많고 사원의 품격이 올라기가 때문에 너도나도 그의 작품이라고 날조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곳은 그 유명하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 네네의 보시사찰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모든 비용이 도쿠카와 이에야스에서 나왔으니 그가 엔슈에게 의뢰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신빙성이 높은 정원이죠.

 

 

 

방장앞에 펼쳐지는 카레산스이 정원입니다.

다만 이곳은 단순히 예전 정원만으로 구성하지 않고 매년 이렇게 현대작품도 같이 배치합니다.

참 특색있는 곳이죠.

 

어찌보면 정원을 훼손하는 듯 보이지만, 보면 볼수록 신구의 조화가 뛰어납니다.

큰 이질감 없이 받아들여지죠.

 

 

 

가을에는 이런 모습입니다만 봄에는 좀 분위기가 다릅니다.

역시 벚꽃이 피어야 이 정원은 화려함을 느낄 수 있죠.

 

 

 

정원 우측편에 시다레자쿠라 나무 세그루가 봄이 되면 쓸쓸한 봄에 화려함을 더하게 됩니다.

상대적으로 간결한 정원과 화려한 사쿠라의 조화도 뛰어나죠.

 

 

 

칙사문에 내려앉은 벚꽃이 문의 청동지붕과 묘한 조화를 보입니다.

고다이지는 봄에 이곳 방장을 제외하면 벚꽃을 만날 만한 곳이 거의 없습니다.

원래 이곳이 단풍 최적화 사원^^이기 때문에 그런 경향이 심한 편입니다.

그래도 일본사원에 벚나무가 없을 수는 없으니..

 

 

 

멀리 히가시야마가 보입니다.

고다이지 방장정원은 생각보다 넓은 정원입니다. 카레산스이 정원에서는 큰 축에 들죠.

그러나 그냥 원뿔모양의 모래산과 파문모양의 모래무늬밖에 없어 단조로와 보이지만, 멀리 히가시야마를 조망하면서 정원을 감상하면 넓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차경기술이 제대로 쓰이지 않아 그리 큰 감흥은 없지만, 가을에 야간조명에 빛날때는 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방장을 벗어나오면 고보리엔슈가 작정했다는 정원이 나옵니다.

왼편에 보이는 건물이 개산당이고 이 곳을 중심으로 양쪽에서 회랑이 뻗어나옵니다. 한쪽은 방장쪽으로 나아가고, 다른 쪽은 언덕의 도요토미의 영묘쪽으로 올라갑니다. 

개산당 양쪽으로는 연못이 존재하여 회랑은 다리의 역활도 하게 됩니다.

 

 

 

저 건물들은 모두 창건당시의 것입니다. 고다이지도 여타 사원과 같이 화재로 인해 많은 부분이 소실되고 재건되었지만, 이 정원쪽의 건물은 약간 떨어져있어서인지 400년가량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정원은 상당히 입체적입니다. 개산당 양옆으로 호리병모양의 연못을 두군데나 파고 그 위를 누각이 있는 다리를 올렸고, 그앞에는 높고 낮은 둔덕을 두고 석물을 배치하였습니다.  상당한 공이 들어간 정원이죠.

 

 

 

 개산당 동쪽의 연못, 가류치(臥龍池)에 그 위에 올린 가류로(臥龍廊)와 단풍의 반영이 아름답습니다.

 

우리에게는 극악의 인물로 비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와 연관이 많은 사찰이 이 고다이지입니다.

일단 세운 사람이 그의 정실부인이었던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이고, 사원 높은 곳에는 이 두 부부를 모신 영묘까지 자리하고 있습니다.

건물들도 예전 이들이 같이 살던 교토 남부 후시미성에서 이건한 것이고요.

 

이 사원을 세우게 자금과 후원을 해 준것은 도요토미가문을 멸망시킨 도쿠카와 이에야스입니다.

네네는 도쿠카와와 협조를 하면서 만년을 지내게 됩니다. 어찌보면 배신행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에도막부 시절 당당히 도요토미의 제를 지낼 수 있었던 곳이 이곳뿐이었습니다. 이에야스에게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기 위해 허가받아 지은 절이었으니...

 

네네가 히데요시의 사후, 철저하게 도요토미가문과 선을 긋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직접 낳은 자식이 없어 후계자는 측실인 요도도노의 자식 히데요리가 차지하게 되고 그녀는 교토에서 은거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히데요시와의 추억으로 같이 살던 건물을 이건해서 절로 개축하고 정원또한 후시미성을 모방하여 작정하는 등 남은 19년의 세월을 이곳에 틀어박혀 지내게 됩니다.

 

어찌보면 철저하게 히데요시를 사랑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처지를 알고 조용한 만년을 지낸 덕분에 76세로 장수도 하였고,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당하며 오사카성이 불타는 것도 지켜보았고,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죽는 것도 보았죠.

더구나...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토요쿠니 신사가 파괴되고 그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것도 보았겠죠.

 

나중에 에도막부가 망하고 1925년이 되어서야 이들 부부가 다시 신으로 추존되어 신사에 모셔지게 됩니다.

한때 권력을 호령했던 요도도노는 그의 자식과 함께 자살하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지만....

 

 

 

 

 

 

고다이지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는 다실입니다.

일설에는 후시미성에서 이건한 것이라는 것과 고보리엔슈가 직접 제작한 것이라는 설이 팽팽합니다..

 

일단 특이한 것은 이 두 건물이 복도를 통해 이어져 있습니다.

한쪽은 카사테(傘亭)과 다른 한 건물은 시구레테(時雨亭)으로 히데요시와 네네의 관계, 즉 결혼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설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없지만...

 

일단 정원에 대한 것은 이것으로 마치고, 봄과 가을에 행하는 야간배관의 풍경을 올리려 합니다.

예전에도 몇번 올린 적은 있지만, 다시 한번 올려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야간배관시 방장정원은 화려한 조명으로 빛납니다.

그것도 나이트에 온 듯하게 가지각색의 컬러와 문양이 돋보이죠.

이런 것이 정지한 것이 아니라 계속 돌아갑니다.

 

 

 

밤에 보는 개산당 주변대 대단합니다. 특히 가을에는 단풍에서의 빛이 더욱 좋습니다.

 

 

아까의 방장정원입니다. 아까와는 조금 다르죠..

 

 

 

가류치(와룡지) 주변으로 단풍나무가 심어져있어 이곳에 조명이 가해지면 밑의 연못에 반영이 훌륭하게 비치게 됩니다.

 

 

 

 

야간에 반영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하죠.

사진과는 달리 실제 가면 더욱 화려함에 빠지게 됩니다.

역시 카메라가 모든 것을 되살릴수는 없습니다.

 

 

 


 

 

11. 뵤도인 (平等院)

 

 교토에서 현존하는 정원중에서는 제일 오래된 정원이라고 할 수 있는 뵤도인 정원은 지금까지 살펴본 정원과는 다른 양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정원은 크게 두종류로 연못을 중심으로 주변을 거닐수 있는 치센카이유 정원과 물이 없이 모래와 바위, 나무로 자연을 표현하는 카레산스이 정원입니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 양식이 존재하고 파생되나, 이보다 좀더 오래된 양식이며 한시기에만 나타난 정원이 뵤도인 정원이 대표적인 죠도(淨土)식 정원입니다.

 

죠도식 정원은 불교의 극락정토를 표현한 만다라를 현세에 재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양식은 일본정원사에서 상당히 특이한 형식이고 이후 사라져 다른 정원에 영향을 끼치지도 않았습니다.

 

뵤도인이 창건된 것이 1052년으로 당시 즉, 헤이안 시대 일본에서는 말법사상이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말법은 단순하게 말하면 부처가 열반하고 2000년간은 세상이 평온하고 이후 2001년부터는 혼란의 시대가 온다는 사상으로 딱 1052년이 그 초년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귀족들은 말법의 세상에서는 사후 성불(成佛)을 할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저세상에서 제일 좋은 극락에 왕생하기를 염원하며, 그 극락정토를 재현한 정원을 전국에 세우게 됩니다. 이는 천황이나 최고의 귀족, 지방호족 모두에게서 유행했었으나, 물론 그들만의 문화였습니다. 당시에도 불교는 평민의 종교는 아니었죠.

 

 

 

뵤도인인 있는 우지(宇治) 지역은 예전부터 귀족들이 만년을 보내는 은거지로 한다하는 귀족들의 별장들이 즐비하던 귀족타운^^이었습니다. 뵤도인도 그 별장중의 하나였고 이를 당시 최대의 권력자 섭정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999년 접수, 그 아들 요리미치가 아버지 사후 절로 개조한 것입니다. 

 

더구나 우지에는 후지와라 가문의 매장지가 있었고, 당시 풍습이 매장지 주변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을 염원하였죠. 그런 이유에서 뵤도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일본은 우리와는 달리 묘지를 가까이 두는 것에 거부반응이 별로 없습니다. 보통 주택가에도 곳곳에 묘지가 있고, 사원에도 뒤쪽에 어김없이 묘지가 있죠.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는 조상을 멀리 멀리 두는 것을 원합니다.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으로 조상을 이용해 후손이 잘 되기를 바라기도 하여 외딴 산골에 모시죠^^

 

암튼 문화가 퍽 다르네요..

 

 

 

방위를 보면 위의 저 다리를 넘게되면 서쪽으로 가게 됩니다.

보통 저승을 서방정토라고 부르는 원리에서 저 다리를 넘어가면 저승으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최근의 발굴을 통해 이 다리들은 재현한 것이고, 검게 변색한 호오도(鳳凰堂)와는 차이를 보이지만, 원래 봉황당도 이렇게 극채색의 주홍색으로 채색되어 있었습니다.

 

봉황당이 봉황이 두 날개를 펼치고 꼬리부분이 펴고 있는 것을 그대로 형상화한 건물이라는 것과 일본 10엔동전에 새겨진 사실은 잘 아실 것이니 넘어가고요, 봉황당, 그안의 아미타여래좌상 등 모든 것이 국보입니다.

 

봉황당 옆에 박물관이 있는데 이곳에 가면 진품 비천상도 볼 수 있고, CG로 재현한 창건당시의 봉황당과 뵤도인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고 들어갔는데, 상당히 흥미롭더군요. 건물자체도 훌륭한 편이고요.

 

 

 

제가 뵤도인을 갔을 때는 한창 벚꽃철이어서 곳곳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습니다.

특히 검은 봉황당을 배경으로 흰 사쿠라는 정말 훌륭한 조화를 보여줍니다.

 

저 봉황당은 창건당시 내부도 화려한 극채색의 불화로 장식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당시 최고의 불상제작자 죠쵸(定朝)가 제작한 아미타여래좌상이 중앙에 안치되고 운중공양보살들이 구름을 타고 벽면에 나는 듯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아미타여래상은 여전히 금색으로 빛나지만, 여타의 채색 불상은 모두 그 빛을 잃고 있지만, 박물관에서는 화려했던 예전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화려했던 뵤도인도 앞에서 다루었던 여러 정원들과 같이 권력이 무너지면서 크게 쇠퇴하게 됩니다.

특히 뵤도인은 좀 상태가 심하게 됩니다.

 

일단 이 우지지역이 전략적으로 교토의 최남단 방위선이 됩니다. 큰 우지가와가 흐르기 때문이죠.

그러다보니 이러저러한 전쟁이 이 주변에서 끊이질 않게 되고, 이곳에 세워진 뵤도인은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세워진지 300년도 안된 1336년 우지에서 벌어진 큰 전쟁으로 인해 거의 모든 불당과 다보탑등이 소실되고 저 봉황당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습니다. 그 이후에도 이곳이 교토시내에서 상당히 먼 지역이라서 금각사나 은각사와는 달리 상당히 오랫동안 방치됩니다.

1600년대가 되어서야 제대로 정비가 되어 거의 300년동안 방치되게 됩니다.

 

출입이 자유스럽다 보니 봉황당의 벽면에는 요즘 관광지의 낙서와 같이 서민이나 문인들, 관광객들의 낙서로 덮이게 되고, 그들의 출신지도 일본 전국에 이른다고 합니다.

지금은 국보로 보호되지만, 당시는 폐허 그 자체였죠..

 

 

 

봉화당의 상징, 봉황이 지붕의 치미부분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다루었지만, 봉황이 올라있는 건물은 대부분 정토사상을 표현한 것이 공통적입니다.

아무래도 이 봉황당에서 유래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봉황당의 맨 뒷부분입니다. 꼬리부분이죠.

 

이 뵤도인을 세우면서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극락으로 왕생했을지는 몰라도 이것때문에 우지지역이 지옥으로 변했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결국 극락정토는 저승을 의미하고, 저승은 죽음을 의미하게 되죠. 그러니 이곳이 바로 죽음으로 이르는 가장 빠른 길, 전쟁이 속발하게 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보다는 더한 지옥도 있었습니다.

뵤도인을 세운것은 후지와라 가문에 소속된 장원의 농노들이고 이들 하층민들은 화려한 뵤도인의 건축비용으로 인해 시달리고, 창건당시는 이론적인 말법사상보다 교토지역이 대기근이 엄습하여 생지옥이 되어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위정자라는 사람, 최고위층은 자신만 좋은 곳으로 가겠다고 착취를 하게 되죠.

이런 점에서 긴카쿠지를 세운 아시카가 오시마사와 겹쳐집니다.

 

그러한 타락한 위정자때문에 후세에 문화유산은 남겼지만, 그 역사적 상황을 알면 여운이 남게 됩니다.

 

 

 

그러한 과거와는 달리 봄에 본 뵤도인 정원은 배후에 소나무로 덮이고, 맑은 연못에 떠있는 극락과 같이 보입니다.

 

봉황당 안쪽에 들어가 최고의 걸작 아미타여래상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나라의 도다이지 청동불과는 달리 좀 온화해보이는 불상이죠.

 

 

 

벚꽃이 드리워진 봉황당의 모습은 요리미치의 의도대로 천국의 이미지를 현세에 재현한 듯 보입니다.

역사적인 의미는 차치하더라도 건물 자체는 완성도가 높은 걸작입니다.

 

한편 뵤도인은 어디까지나 후지와라 가문의 개인 사원이었습니다. 요즘같이 아무나 들어올수 있는 것이 아니라 후지와라 사람만 드나들 수 있고, 또 그들의 번영만을 기원하는 사찰이었죠.

 

그러다보니 저 봉황당 맞은편에는 코고쇼(小御所)라는 침전형태의 건물이 있어 이곳에서 봉황당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즉 한정된 가문사람만 저 환상적인 광경을 즐길 수 있었다는 거죠.

 

 

 

아쉽게도 봉황당 정면은 역광과 구름으로 인해 완전히 망쳐버렸습니다.

먼저 정면을 찍지 않은 것이 후회도 되고, 박물관에서 기념품 쇼핑덕에 시간을 끈 것이 한스러웠죠.

 

 

 

그래서 이렇게 사쿠라가 덜 핀 가지를 붙잡고 다른 구도에서 담아도 보았습니다.^^

봉황당은 맑은 날 순광일 때 저 연못에 봉황당이 반영되는 것을 노리는 것이 촬영의 기본인데... 

 

더구나 이곳은 반나절 잡아먹는 곳이라서 자주 올수 없는 곳이죠. 주변에 여러 신사도 있지만 큰 매력이 있는 곳이 아니라서요.

다만 봄에는 강변을 따라 벚꽃이 한창 피어서 그곳을 거닐면서 일본사람들이 벚꽃놀이를 어떻게 하는지 지켜볼 수 있죠.

참 다양하게 즐깁니다.^^

 

 

 

또한 등나무꽃이 필때 뵤도인을 찾으면 여행책자에 자주 등장하는 등나무꽃이 드리워진 봉황당의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때가 묘해서 시도하기가 힘들긴 합니다만...

 

이렇게 정원 베스트 11 시리즈가 끝났습니다.

 

제 글을 다시 보면 장황하게 써 놓은 것도 있고, 정작 정원에 대한 이야기는 소홀했던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정원 이해보다는 역사쪽이 약간 강하지 않았나 합니다.

 

제가 쓴 정원에 얽힌 이야기는 단순한 여행책자에는 거의 다루지 않는 내용이 많았을 겁니다.

전 정원을 그것을 세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의 삶과 대치되는 정원일 수도 있지만, 그래야만 했던 사정도 있었겠죠..

 

솔직히 일본정원 너무 파고들면 머리 너무 아픕니다.

조그만 돌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이끼 한 무더기에도 다 이유가 있거든요.

그렇게 세세한 것에 신경쓰면 정원 전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전 정원을 볼때 먼저 처음 무엇을 느꼈는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제가 쓴 내용을 포함해서 여행가이건 건축전문가이건 정원전문가의 글이건 간에 정원은 그것을 바라보는 당사자가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글들은 그것을 도와주는 참고서일 뿐이죠. 너무 그것에 의존하면 정원 그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봅니다.

 

부족한 글 지금까지 봐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다음에는 이렇게 낚시^^적인 제목은 삼가하며 좀더 내용있는 글을 올리겠습니다.

 

 

 

 

출처 : 일본 교토 이야기
글쓴이 : Meryamu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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